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세포이 항쟁 (문단 편집) == 세포이 용병들 == 인도에 주둔한 [[영국 육군]]에는 많은 인도인 용병들이 있었는데, 1850년 당시 영국군 269,000명 중 영국인은 46,000명에 불과했다. 이들은 [[이슬람]], [[힌두교]], [[시크교]] 등등 다양한 종교 신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들 용병을 가리켜 '[[세포이]](sepoy, [[페르시아]]어의 '[[시파히|sipahi]]'에서 유래)'라고 불렀다. 이들은 영국 [[동인도회사]]가 인도 정복을 위해 고용한 것이었다. 영국은 이들을 출신지역에 따라 3개군으로 나누어 배치시켰는데, 각각 벵골군, 봄베이군, 마드라스군이었다. 그러나 이들 사이에도 처우에 대한 불만이 있었는데, 우선 연공에 따라 진급을 시키는 영국 육군의 진급 제도를 적용하다 보니 나이가 어느 정도 있던 세포이들은 상대적으로 진급에서 불이익을 겪었다. 또한 '''[[힌두교]]도 상층 [[카스트]]들은 인도의 바깥 세계로 나가는 것을 꺼렸는데'''[* 힌두교 [[마누 법전]]에는 한 번이라도 바다에 나갔다 돌아올 경우 이전의 계급과 상관없이 무조건 최하위 계급인 수드라로 강등한다는 규칙이 있었기에, 특히 높은 카스트는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 것을 꺼렸다. 예를 들어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도 영국으로 유학을 가기 전에 집안의 [[친척]]들이 이 마누 법전을 근거로 하며 반대했기에 이를 심각하게 고민했다.], 영국인들이 해외 원정을 요구하면서 세포이들과 갈등을 빚었고 영국 측에서는 이에 해외 원정을 거부하는 세포이들을 해고하도록 하는 지침으로 대응했다. 그래도 먹고 살려고 입대한지라 참고 있었는데 1856년 제정된 일반 복무 규정에 의하여 '''벵골군의 상당수는 해외 원정에서 제외되었다.''' 게다가 이들의 수가 늘어나자 동인도 회사 측은 '''경비를 아끼려고 세포이들의 퇴직 연금 지급을 중단했다.''' 특히 벵골군 세포이들은 퇴직금 부담을 줄이려고 봄베이군이나 마드라스군보다 급료까지 적게 받는 와중에 이 일이 터져 버렸다. 여기에 1856년 아와드 지역이 병합되자 세포이들은 자기 지역에서 누려온 토지세 특권이 축소되는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사실상 세포이들은 토지세 특권을 이유로 세포이업을 세습 가업으로 삼고 있었다. 즉 세포이 항쟁의 배경에는 종교적 이유 외에도 생업적 문제와 기득권 사수가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